죽서루는 한 시대에 완성된 건물이 아닙니다. 1403년 다시 지은 다섯 칸에 남북 한 칸씩을 더하면서, 짜임과 천장에 시기별 특징이 남았어요. 건축의 변화와 이를 읊은 시·그림을 함께 살필 수 있어 누각의 역사와 경관을 잇는 연구 자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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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천과 어우러진 누각
삼척 죽서루는 오십천과 어우러진 경관이 빼어난 누각입니다. 처음에는 ‘서루’라 불리다가 14세기 후반부터 ‘죽서루’라 불리기 시작했어요.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누각
김극기의 시와 김수온, 허목의 기록 등에는 죽서루의 내력이 전합니다. 김수온(1410∼1481)의 『죽서루단청기』(1472)와 허목(1595∼1682)의 『죽서루기』(1662) 등에는 ‘1403년 부사 김효손이 옛터에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보여요. 허목은 동쪽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어 그 서쪽에 있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죽서루’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소개했습니다. 고려시대에 처음 세우고 조선 전기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 보수하고 늘렸는데, 관련 기록이 잘 남아 있고 조선 후기에 늘린 뒤의 본래 모습도 잘 보존되어 있어요.
바위 위에 세운 기둥, 시대마다 다른 칸
1403년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다시 지은 누정이었는데, 1530년 남쪽 한 칸(옆면 3칸)을, 1788년 북쪽 한 칸(옆면 2칸)을 늘리면서 지금과 같은 팔작지붕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초기의 가운데 5칸과 조선 중기 이후 늘린 좌우 1칸은 기둥 배열, 뼈대의 짜임, 천장과 바닥 처리, 처마를 받치는 짜임과 세부 장식 등에서 시기별로 다른 건축 특징을 보여줘요. 기둥은 절반 이상이 자연 암반 위에 서 있는데, 22개 가운데 13개가 암반 위에 세워졌고 9개는 자연석 초석으로 받쳤습니다. 늘린 남쪽 한 칸은 바닥에 마루를 깔지 않고 암반을 그대로 둔 채, 드나들기 쉽도록 가운데 부분에만 고르게 다듬은 돌을 깔았어요. 안은 벽과 창호가 없이 트여 있고,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나는 연등천장과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습니다. 마루는 우물 정자 모양 나무틀에 짧은 널을 끼운 우물마루이며,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게 난간을 둘렀어요.
기록과 건축, 시문이 함께 남은 국보
여러 기록으로 다시 짓고 늘린 연대가 분명해 역사적 가치가 큽니다. 조선 초기의 모습과 중기 이후 늘린 부분이 원래대로 잘 남아 건물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볼 수 있어 건축사적으로 중요하고, 수많은 명사의 시문과 그림이 남아 학술적 가치도 커요. 오십천과 어우러진 빼어난 경관까지 더해 국보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닙니다.
시와 그림으로 남은 누각
죽서루에는 조선 숙종과 정조가 지은 시를 비롯해 유명한 시인과 이름난 신하들의 한시를 새긴 현판이 많았지만, 1959년 태풍 사라로 많이 없어지고 지금은 28점이 남아 있습니다. 정면에 걸린 ‘죽서루’와 ‘관동제일루’ 현판은 1710년(숙종 36) 삼척 부사로 온 이성조의 글씨예요. 정철의 『관동별곡』처럼 고려부터 조선까지 시인과 묵객 등 여러 계층이 죽서루를 소재로 수많은 시문과 가사를 남겼습니다. 죽서루를 그린 그림도 많은데, 가장 오래된 것은 겸재 정선(1676∼1759)의 『관동명승첩』에 실린 그림이고, 김홍도(1745∼?)와 강세황(1713∼1791) 등도 그림을 남겼어요.
연혁
- 14세기 후반
- ‘죽서루’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 1403년
- 부사 김효손이 옛터에 앞면 5칸 규모로 새로 지었습니다.
- 1530년
- 남쪽 한 칸을 늘렸습니다.
- 1710년
- 삼척 부사 이성조가 ‘죽서루’, ‘관동제일루’ 현판 글씨를 썼습니다.
- 1788년
- 북쪽 한 칸을 늘려 지금의 팔작지붕 형태가 되었습니다.
- 1959년
- 태풍 사라로 현판이 많이 없어졌습니다(지금은 28점이 남아 있음).